高麗軍器監監(고려군기감감) 海州吳公(해주오공) 仁裕(인유) 紀蹟碑文(기적비문)

 

한 나라에 손꼽히는 名家(명가)에는 반드시 顯祖(현조)가 있는가 하면 顯祖(현조)가 있기 前(전)에 벌써 가장 높은 위치를 점유한 어른이 있으니 그를 일러 始祖(시조)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조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系譜(계보)가 分明(분명)하지 못할 때에는 함부로 始祖(시조)를 追崇(추숭)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海州吳氏(해주오씨) 始祖(시조) 諱(휘)仁裕公(인 공)의 경우가 바로 그러함이다. 公(공)은 문무겸비(文武兼備)한 大學者(대학자)로서 일찍이 高麗朝(고려조) 成宗(성종)때 軍器監監(군기감감)을 지내고 穆宗(목종)때 五廟(오묘)와 社稷(사직)을 세울 것을 奏請(주청)하였고 國子監(국자감)에 科擧制度(과거제도)를 設立(설립)함으로써 勉學(면학)의 氣風(기풍)을 고취시킨 輔弼重臣(보필중신)의 役割(역할)을 다하였으니 의당히 事功(사공)과 行蹟(행적)이 있었겠지만 恨(한)스럽게도 世代(세대)가 遙遠(요원)하고 兵亂(병란)이 거듭되어 墓所(묘소)가 失傳(실전)되었으니 家傳(가전)과 史錄(사록)에 攻據(공거)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公(공)의 아들 諱(휘)周裔(주예)는 內庫副事(내고부사)요 孫子(손자) 諱(휘)民政(민정)은 文科(문과) 秘書省監(비서성감)이요 曾孫(증손) 諱(휘)札(찰)은 文科太子詹事(문과태자첨사)요 그 뒤를 이어 判三司事(판삼사사) 諡良平公(시양평공) 諱(휘)延寵(연총) 族譜(족보) 史上(사상) 最古(최고)의 海州吳氏(해주오씨) 族圖(족도)를 草創(초창)한 工曹典書(공조전서) 諱(휘)光廷(광정) 族圖(족도)를 完成(완성)한 議政府(의정부) 舍人(사인) 號(호)滄洲(창주) 諱(휘)先敬(선경) 刑曹判書(형조판서) 號(호)性堂(성당) 諱(휘)潔(결) 選湖堂(선호당) 팔대(八大) 문장가중(文章家中) 한 사람이며 淸白吏(청백리) 吏曹判書(이조판서) 號(호)負暄堂(부훤당) 諱(휘)祥(상) 文化財寶物(문화재보물) 第一○九六號(제일○구육호) 瑣尾錄(쇄미록)을 著述(저술)한 贈領議政(증영의정) 諱(휘)希文(희문) 海州吳氏(해주오씨) 中興(중흥)의 顯祖(현조) 議政府(의정부)領議政(영의정) 諡忠貞公(시충정공) 號(호)楸灘(추탄) 諱(휘)允謙(윤겸) 選湖堂(선호당) 觀察使(관찰사) 贈左贊成(증좌찬성) 號(호)天坡(천파) 諱(휘)䎘(숙) 三學士(삼학사) 中(중) 한사람이며 殉節臣(순절신) 弘文館校理(홍문관교리) 贈領議政(증영의정) 諡忠烈公(시충렬공) 號(호)秋潭(추담) 諱(휘)達濟(달제) 刑曹判書(형조판서) 忠節臣(충절신) 贈領議政(증영의정) 諡忠貞公(시충정공) 號(호)陽谷(양곡) 諱(휘)斗寅(두인) 選湖堂(선호당) 淸白吏(청백리) 文章家(문장가) 兵曹判書(병조판서) 大提學(대제학) 贈左贊成(증좌찬성) 號(호)西坡(서파) 諱(휘)道一(도일) 駙馬(부마) 海昌尉(해창위) 書藝家(서예가) 諡文孝公(시문효공) 號(호)醉夢軒(취몽헌) 諱(휘)泰周(태주) 左參贊(좌참찬) 號(호)微村(미촌) 諱(휘)命峻(명준) 奮武功臣(분무공신) 海恩府院君(해은부원군) 右議政(우의정) 諡忠孝公(시충효공) 號(호)永慕庵(영모암) 諱(휘)命恒(명항) 大提學(대제학) 贈左贊成(증좌찬성) 諡文穆公(시문목공) 號(호)月谷(월곡) 諱(휘)瑗(원) 刑曹判書(형조판서) 號(호)時谷(시곡) 諱(휘)彦儒(언유) 吏曹判書(이조판서) 大提學(대제학) 時文靖公(시문정공) 號(호)醇菴(순암) 諱(휘)載純(재순) 禮曹判書(예조판서) 時正獻公(시정헌공) 號(호)耘齋(운재) 性理學者(성리학자) 諡文元公(시문원공) 號(호)老洲(노주) 諱(휘)熙常(희상) 吏曹判書(이조판서) 諡文靖公(시문정공) 號(호)鍾菴(종암) 諱(휘)取善(취선) 工曹判書(공조판서) 諡孝靖公(시효정공) 諱(휘)冣善(취선) 吏曹判書(이조판서) 號(호)坡雲(파운) 諱(휘)俊泳(준영) 等(등) 賢臣(현신)을 비롯하여 文科(문과)及第者(급제자) 數百名(수백명)과 四代文字諡號(사대문자시호) 三世五忠(삼세오충) 三代道統制使(삼대도통제사) 五代兵使(오대병사) 忠臣(충신) 功臣(공신) 學者(학자) 孝子(효자) 烈婦(열부) 等(등) 數(수)많은 人材(인재)가 高麗(고려) 朝鮮(조선) 兩朝(양조)에 顯遠(현원)한 名閥(명벌)이다. 지난 一九八七年(일구팔칠년) 丁卯(정묘) 봄에 後孫(후손)이 龍仁市(용인시) 慕賢面(모현면) 吳山里(오산리)에 祭壇(제단)을 모아 始祖壇(시조단)이라 하고 每年(매년) 夏曆(하력) 三月(삼월) 보름날에 祭典(제전)을 奉行(봉행)하였다. 이제 大宗會(대종회)에서 이 紀蹟碑(기적비)를 세울제 會長(회장) 福根兄(복근형)이 海州吳氏(해주오씨)大同譜(대동보)를 받들어 不佞(불영)에게 글을 請(청)한다. 銘(명)하되

오홉다 海州吳公(해주오공) 高麗(고려)의 名家(명가)로서 일찍이 靑雲(청운)에 올라 군기감감 지냈으니 官業(관업)과 行蹟(행적)을 의당히 남겼건만 世代(세대)가 遙遠(요원)하고 家傳(가전)이 遺逸(유일)되어 빙거할 곳 없다하나 始祖(시조)로 尊崇(존숭)되고 祭壇(제단)을 淨(정)히 모아 香火(향화)를 받드도다. 後孫(후손)이 繁衍(번연)하여 文章(문장) 名節(명절)과 宰輔(재보) 儒碩(유석)이 끊어지지 않았도다. 實事(실사)를 기록하여 이 빗돌을 세우노니 밝으신 靈(영)이시여 風車雲馬(풍차운마) 돌리시와 吳山(오산) 이 갈피를 굽어 보옵소서.

 

 

 

一九九二年 한가위날

 

文學博士 眞城人 李家源 謹撰

 安東人 金忠顯 謹書

 後 孫 鼎 根 獻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