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싫증한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 삼국시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을지(乙支)

◈ 백 제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고구려시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 인물의 성씨가 많이 보인다. 동명성왕이 신하들에 게 성을 내려 주었다는 극,, 중실, 소실씨 등과 유리왕이 사성하였다는 위,우씨 또는 대무신왕이 사성하였다는 낙, 부정, 대실씨 등은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제 3대 대무신 왕때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만도 목도루, 고복장, 명림답부, 을파 소, 고우루, 명림어수, 음우, 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 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 송, 우, 연, 주씨 등이 나오고 있다. 결국 고구려에서 쓰인 성은 왕실의 해, 고를 비롯하여 을, 송, 목, 창, 예, 우, 연, 주, 명림, 을지등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의 성은 후대의 성과는 개념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중앙 또는 지방세력 중에서도 핵을 이루는 유력한 족장들의 정치적 신분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약간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 는 모두 탐라 고씨계이다. 오직 강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있다.

 

◐ 백제시대

백제가 부족국가의 단계를 넘어 고대 국가로 출발한 것은 제8대 고이왕 시대부터인데 왕실의 성을 처음엔 우씨로 하다가 뒤에 여씨 또는 부여씨로 썼다. 백제 초기의 왕권은 이른바 8대 성의 귀족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았다. 8대 성이란 사, 연,이,해,진,국,목,백씨의 8족을 말함인데 이 중 '국'을 골라서 골로 기록한 사기도 있다. 이 외에 동부에 홀씨가 있었고 목리만치, 조미걸취, 제증걸루, 고이만년, 흑치상지 등의 이름이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도 극히 드물다.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이 되었다는 전섭과 마여를 원조로 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다. 개루왕때 인물인 도미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서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을 시조로 하는 부여서씨가 있다. 이 외에 백제 8대 성과 같은 성으로 진씨,연씨,국씨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다.  

 

신라시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고 생 각한다.박,석,김 3성과 이,최,손,정,배,설의 6촌성에서 연원을 찾는것이 더 합리적 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성과 6촌성이 당초부터 그러한 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대에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을 사용하게 되면서 각각 계보를 소급하여 붙인 것이라 하며 그들은 성을 소급해서 붙일 수 있는 확실한 계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 계보의 주체가 되는 친족 공동체는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난 사람도 있다. 그 예는 진흥왕의 순수비로 서울의 북한산비, 창녕비, 함흥의 황초령비, 이원의 마운령비등의 비문에 나타난 수행자 명단을 보면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성이 없으며 대신 그 사람의 출신부명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진지왕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술오작비나 진편왕 때 세워진 경주의 남산신성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으며 , 성씨가 쓰이기 전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역활을 했던것은 그 사 람의 출신지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양서 신라전에는 '신라왕 모태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법 흥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북제서>에는 법흥왕 다음 임금인 진흥왕을 김진흥, 진평왕을 김진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그 밖의 6촌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다만 가락국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은 제외이다. 가락국이 법흥왕때에 신라에 의해 병밥 흡수되면서 가락 왕실의 직계 후예가 신라 최고 신분인 진골에 편입되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김유신의 누이가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처음으로 김씨를 사용하게 된것 같다는 설도 있다. 신라 시대의 성씨로는 3성과 6촌성외에 9세기 초 당나라에 갔다온 후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가 처음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 성 의 등장을 보게 된다.

 

◐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 조선시대, 현대 성씨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